오늘은 학교가 너무 피곤했던 관계로
그냥 하루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사실 못 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뭐 게임을 한다거나 술을 먹는다거나
하다 못해 거실에 나갈 의욕조차도 없어서
그냥 침대에만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그러다가 10시쯤 졸려서 잤다가 12시에 깬 이후로
여태껏 또 아무것도 안 했다
정말 식물인간과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황금같은 휴일을 쇼츠와 알 수 없는 유튜브 영상과 기타 쓰레기 정보 수집 등으로 날리고
다시 자기 직전에 든 생각인데
인류의 미래는 쇼츠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객체들이 갈수록 간결해짐과 함께 편리해지고 있다
가령 유튜브 영상은 슬슬 숏폼으로 대체되어가고 있고
두꺼운 종이책은 패드로 보는 전자책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필기를 위한 공책은 그냥 패드로 바뀌어가고 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당연히 편한 걸 쓰려고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 1분정도 생각했을 때는
아 이대로 계속해서 편의 중심으로 인류가 발전한다면
먼 미래의 인류는 10초짜리 영상들을 하루종일 스크롤하고
평생 한 침대에 누워서
AI들이 떠먹여주는 재화에 빌붙어 사겠구나
라는 결론을 냈었는데
더 생각해보니 그건 또 아닐 것 같고 해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전자책 같은 경우에는
학창시절 토론주제로도 자주 쓰이는 소재인데
보통 전자책이 종이책을 넘어설 수 있는가와 같은 논제가 많다
이런 토론을 하게 되면 종이책 옹호파 측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느낌을 따라갈 수 없다는 둥 사실 책의 본질에서는 조금 벗어난 근거를 들며
전자책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의 고사를 지내게 되는데
밀리의서재 같은 전자책 기업들이 최근 들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기도 하고
종이책 옹호파도 인터넷에 저장된 저널 자료들을 참고하여 논거를 준비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 토론의 답은 전자책의 승리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글은 이렇게 썼지만 사실 나도 종이책 옹호파의 일원이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우선 내 책장에 책이 수집되어서 꽂혀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 물욕과 수집욕을 충족시켜서 꽤나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책을 이용해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나로 하여금 내가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 있다고 착각케 하는데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양감을 끊기가 꽤나 어려운 편이다
주변에서 "와 너 이런 것도 공부해?"라는 말까지 해주면 금상첨화다
그리고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전자책은 책의 특정 지점을 찾는 것이 상당히 귀찮은 데 반해서
종이책은 특정 페이지가 정확히 N페이지에 있다는 수치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책의 두께를 통해 이 페이지가 어디쯤 있다는 시각 정보까지 제공하기 때문에
나중에 책의 어떤 부분을 다시 보려고 할 때 빠르게 기억해내기 쉽다
여기에 더해 내가 어렴풋이 기억만 하고 있던 특정 내용을 찾아야 할 때
종이책은 수십 페이지를 빠르게 훑으면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편리하다
전자책을 그렇게 넘기려면 수십 번 화면을 터치해야 하는데
그 조작감이 영 좋지가 않다
그렇다 보니 내용이 연속적이지 않고 부분부분만 읽어도 되는
전공책 등을 읽을 때에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이 편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뭐 이렇게 억지로 쉴드를 쳐 봐도
나도 이성적으로는 전자책이 무겁지도 않고
저렴하고
필기도 자유로우며
수천 권을 한 전자기기에 넣어다닐 수 있는 등
종이책보다 장점이 수십 가지는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종이책이 주는 감성과 약간의 실용성이 좋고
며칠 전에도 전공책 한 권을 더 수집했다
왜냐하면 나는 애초에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에게 적용되는데
기본적으로 인류는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실용적인 이득을 주는 선택지만을 고르진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장인의 시계 - 전자시계가 더 정확함에도
장인의 도자기 - 다이소에서 훨씬 저렴한 도자기 그릇을 판매함에도
수제 명품 가방 - 동묘에서 동일한 제품이 훨씬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음에도
수제 조립된 자동차 - 공장이 조립을 더 잘 함에도!
등등에 크게 열광하는데
저들만의 분명한 매력이 조금은 있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인생을 바쳐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감성을 자극시켜 무형의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저 물건들 속에 있는 이야기에 값을 매긴 것이지
실용적인 가치에 값을 매겨서 웃돈을 주고 저런 물품들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이걸 부르는 단어도 따로 있을 것 같으나
내가 못 찾겠으므로 패스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과거의 유산에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조금 해봤는데
결론은 물건에 새겨진 이야기가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가령 음악 감상 분야에서는 시간순에 따라
직접 공연 가기 - LP - 테이프 - CD - MP3 -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양 극단에 있는 공연과 스마트폰 시장은 수억 명을 먹여살리는 아주 큰 시장인데
공연은 누군가 인생에 한 가지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이야기"의 요소가 아주 강하며
그와 정 반대로 스마트폰은 별 추억은 없어도 정말 "편리"하기 때문에 사용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런데 저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LP 시장이다
왜냐하면 LP 시장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당연히 스마트폰보다 음악을 듣기 불편하기 때문에
잘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으며
LP바와 같은 LP 감상 관련된 사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현재도 힙합 가수가 LP로 낸 앨범이 아주 잘 팔리는 등
아직도 꽤나 큰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의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1. 기본적으로 꽤나 예쁘고 비싸기 때문에 수집욕을 자극하며
2. 독특한 음질을 가지고 있고
3. 신기한 기계(축음기)로 작동시키며
4. 한 번 새겨진 것을 바꿀 수 없어 LP 자체가 나만의 무언가가 되기에
아직까지도 수많은 매니아층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반해 CD나 테이프, MP3는 특정 용도를 제외하곤 음악 시장에서 거의 사장된 상태인데
우선 CD와 테이프는 MP3로 대체가 되기도 하고
수집욕을 자극하긴 하지만 LP만큼 힙하지도 않고
수정도 자유자재로 가능해서 고유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CD나 테이프 플레이어는
기계적인 원리와 추상적인 원리 사이의 그 어딘가에 위치한 물건인데
이게 참 스토리를 부여하기가 애매하다
축음기는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작동 원리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대상에 대해 인간은 더 정을 잘 주는 편이기에
스토리를 부여하기가 쉽지만
CD 플레이어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해하더라도 내 몸에 와닿지가 않기 때문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다
CD를 쓰는 사람에게 더 좋은 CD 플레이어를 주겠다고 하면 대부분 좋아할 것이지만
LP를 듣는 사람에게 골동품 축음기를 다른 새 축음기로 바꿔주겠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테이프도 이와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CD와 테이프는 뭐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편하지도 않은데
정을 붙이고 스토리를 만들 요소도 조금 떨어져서
사장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내가 나중에 뭔가 사업을 한다 치면
결국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진짜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 자신이 없으면
물건에 추억을 붙이고 이야기를 써내서 판매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방법일 것이다
뭐 삼겹살을 판다고 치면
전자는 좋은 고기를 싸게 파는 것일테고
후자는 아주 좋은 고기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붙여서 (녹차 먹인 돼지라거나)
비싸게 파는 것이겠지
솔직히 요즘 나오는 플랫폼이건 물건이건 엄청 상향평준화되어서
다 거기서 거기고 비슷비슷한데
감성을 자극해서 내 걸 더 고르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늘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하지 않나 싶다
사실 써놓고 보니 당연한 이야기여서 슬프다
나는 언제쯤 어른의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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